#디토리안[디토리안] 21세기 우리는 왜 트렌치코트를 입나?

박진아 디토리안
2026-10-01

21세기 우리는 왜 트렌치코트를 입나?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버버리 트렌치’ 전시회

‘영국적 감성’ 실용주의에서 아우터의 창의적 재해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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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 display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South Kensington, London.

© Jeff Spicer/PA Media Assignments


올 가을도 어김없이 산천과 도심의 가로수는 자연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색의 물결로 물들고 있다. 아침저녁 서늘해지며 옷장에서 다시금 외투를 꺼내 입게되는 지금,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Vitoria & Albert Museum,이하 V&A)에서는 9월 21일 ⟪버버리 트렌치: 패션 아이콘 만들기(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전(2026.9.21~2027.1.3)을 개막했다.

 

겉으로 ⟪버버리 트렌치⟫는 명품 트렌치코트 브랜드 버버리의 탄생 170주년을 기념하며 런던 패션위크 폐막과 동시에 열리는 블록버스터 패션 디자인 전시회지만, 실은 문화를 매개로 한 세심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마케팅 캠페인이다. 올해로부터 꼭 80년 전인 1946년, 버버리는 V&A가 기획한 영국 디자인 및 제조업 진흥 산업 디자인 전시회에서 장차 영국의 산업 부흥을 이끌 유망 기업으로 처음 소개됐었다.


오늘날 V&A가 방대한 버버리 아카이브 자료를 소장하며 이번 전시에 활용할 수 있는 것도 그 인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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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다움(Britishness) 서사를 전달 의도가 강하게 전달된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의 새 패션디자인 전시회 ⟪버버리 트렌치: 패션 아이콘 만들기(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2026.9.21~2027.1.3)의 전시 광경. 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 display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South Kensington, London. © Jeff Spicer/PA Media Assignments

 

# 비 막이용 방수천에서 패션 아이콘으로


전시는 발명(Inventions)으로 이름된 전시 도입부에서의 버버리 트렌치코트 탄생설화(brand origin story)부터 출발한다. 버버리코트의 원단은 1879년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고안한 방수천이다. 면실을 직조하기 전 실 한 올 한 올을 라놀린(양털에서 추출한 천연 왁스)으로 방수 처리한 뒤 촘촘한 능직으로 짜낸 개번딘 원단은 당시로서는 의류업계의 혁신이었다.

 

이 방수 개버딘 원단을 재단해 제작된 낙타색 베이지 톤의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벨트형 롱코트는 가볍지만 비 많고 습한 영국 기후 속에서 착용자의 몸을 보호하고 보온 효과까지 제공했다. 출시 후 20여 년간 타이로켄 코트(Tielocken Coat)로 불리며 비오는 날 장화를 신고 사유지 숲과 정원을 거니는 귀족과 부유층의 브리티시 컨트리하우스 스타일의  일부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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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날씨를 대변하는 흐리고 우중충한 하늘과 비를 연상시키듯, 전시장 실내 천정에 설치된 구름 그래픽 설치물은 관객들로 하여금 버버리 트렌치코트가 애초부터 해결하고자 했던 영국의 문제거리인 흐린 날과 비 많은 기후를 풀어냈다고 말하는 듯하다. 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 display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South Kensington, London. © Jeff Spicer/PA Media Assignments

 

 # 영국적 수공예(Craft) 정신이 한 벌의 외투로


인류 역사 속에서 과학기술 혁신은 전쟁기 동안 추진되고, 전쟁이 끝난 평화기가 되면 일반 대중을 위한 소비재로 변신한다. 버버리 트렌치코트는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다.

 

버버리 트렌치코트가 영국적 실용주의를 본격 발휘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기, 기관총과 대포 같은 대량 살상 신무기의 등장으로 기동전이 불가능해지자 전쟁터 최전선에 참호를 파고 대치했던 전술이 등장했던 때다. 혹독한 기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병사들을 춥고 습한 참호로부터 보호할 군용 트렌치코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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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는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외투를 책임지며 제품을 인지시키는 20세기 판 ‘작품 속 광고(product placement)‘ 기법을 절묘하게 공략한 브랜드다. 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 display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South Kensington, London. © Jeff Spicer/PA Media Assignments

 

오늘날 우리가 누구나 보면 ‘버버리’라고 알아차리는 아이콘적 특징은 이 당시 완성된 것들이다. 이때 병사들의 신체 안전과 군수품 휴대를 돕기 위해 코트에 다양한 기능적 디테일이 더해졌다. 


베이지색 개버딘 원단, 칼라, 하우스 체크 안감, 가슴을 보호하는 더블브래스트 여밈, 빗물을 막는 어깨의 스톰 플랩, 견장, 손목 버클 스트랩, 무기 휴대용 D-링은 군용 외투로 변신한 버버리 트렌치코트에는 전쟁이라는 위기의 순간 탄생한 영국인 특유의 실용주의와 수공예 혁신을 담고 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용 지상전 지상전 군복을 넘어, 영국 왕립 해군·공군·개척병 부대의 군용 아우터로 영역을 넓혔다.

 

# 창의성을 전방에 내세운 명품 아우터로 봐 주세요


전시를 기획한 오리올 컬른(Oriole Cullen) V&A 패션직물부 수석 큐레이터는 버버리와 전쟁의 관계사보다는 1990년대 후반기부터 현재까지 브랜드가 개척해온 ‘창의성(creativity)’을 전달하는 데 가장 주력한다.

 

버버리 귀족의 컨트리 스타일 복장, 제1·2차 세계대전 군용 유니폼을 넘어 대중 소비자를 겨냥한 고급 글로벌 패션 디자인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기까지엔 20세기 후반기 전후(戰後) 세계 경제 재건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한 미디어 마케팅이 결정적이었다.


험프리 보가트가 고전 필름 느와르 ⟪카사블랑카⟫에서 입었던 그 외투,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에서 빗속에서 애완고양이를 찾아 헤메고 사랑을 고백할 때 입었던 그 코트, 애틋한 멜로영화 ⟪셸브르의 우산⟫ 속 카트린느 드뇌브가 걸쳤던 그 벨트형 비옷은 1940~60년대 영화 관객들에게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사랑, 낭만, 우수의 심벌로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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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는 21세기 새 구매 고객층 발굴과 뇌리 인지시키기 전략을 위해 파격적 디자인과 아이콘적 브랜드와 노바 체크가 두드러진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 display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South Kensington, London. © Jeff Spicer/PA Media Assignments

 

이후 2000년대 초,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iley)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 버버리는 당시 집권한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의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ia)와‚ 이제 우리는 모두가 중산층(We’re are all middle class now.) 선언과 결을 같이하며, 그 당시 경제호황 분위기를 틈타 출세지향적이고 낙관주의 들뜬 전 세계 중산층 소비자들을 향해 호소했다.

 

그러나 럭셔리 브랜드의 폭넓은 소비층을 겨냥한 마케팅은 부작용도 낳았다. 베일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재임 기간 버버리의 광고 캠페인을 담당했던 거장 사진가 마리오 테스티노(Mario Testino)의 렌즈를 통해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두 왕자,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등이 두른 버버리 트렌치와 노바 체크(Nova Check) 패턴은 누구나 알아보는 명품 아이콘이 됐지만, 동시에 중국산 짝퉁 의류를 걸친 축구 훌리건이나 거리  부랑자와 결부되며 브랜드 가치 훼손 논란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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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버버리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변화하는 시대와 유행에도 변치않는 영원함(timelessness)이다. The Burberry Trench: Crafting an Icon’ display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South Kensington, London. © Jeff Spicer/PA Media Assignments

 

하지만 제아무리 유구한 전통과 권위를 지닌 브랜드일지언정 새로운 소비자층 발굴을 하지 않으면 자멸하고 마는 게 비즈니스 세계의 생리던가. 버버리는 21세기 하고도 사반세기를 넘긴 현재, 어느새 글로벌 최대 소비자층으로 부상한 Z세대 공략에 한창이다.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hi)의 뒤를 이어 2022년 새로 부임한 대니얼 리(Daniel Lee)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체제에서, 버버리는 티시 시절 추진된 문화적 다양성에 기반한 크리에이티브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20년 전 백인 중장년층 부유 소비자를 주 타깃으로 했던 구시대 마케팅을 뒤로 하고, 다양한 인종 및 문화배경의 젊은 유명인들의 브랜드 대사로 기용해 소셜미디어 채널을 통해 과시와 요란함의 언어의 광고 캠페인도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치코트라는 패션 품목은 변화하는 시대와 유행 속에서도 여전히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성과 유연성을 잃지 않는다. 별달리 실험적이거나 도전적인 기획 의도가 없던 이번 전시는, 버버리가 의류와 브랜드 역사가 시대적 요구와 유행에 따라 변화해왔어도 원래의 실용적 의도와 솔루션(구름 끼고 습기 많은 기후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주는 아우터)은 변하지 않았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나이 든 세대는 한 박물관 안에서 빈티지 버버리 트렌치코드를 새롭게 바라보고, 신세대 패션 소비자들은 구매 욕구를 새로이 시험해볼 수 있는 V&A의 이번 전시 ⟪버버리 트렌치: 패션 아이콘 만들기⟫ 역시 또 하나의 성공적인 버버리식 마케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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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디토리안

박진아 디토리안은 사회학・미술사학 전공 후 1998년부터 해외 유수 미술관 근무 경험과 미술 평론과 디자인 저널리즘 경력을 바탕으로 미술 커뮤니티와 대중 독자 사이를 잇는 문예 평론가로 정진 중. 21세기 최신 현대 문화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슈, 형상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통찰하며 인사이트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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