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토리안[글로벌]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서 얻는 교훈(2)

김묘환 디토리안
2025-03-12

<디토리안> 김묘환과 읽어내는 일본 패션 비즈니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서 얻는 교훈(2)

60년대 ‘패션 비즈니스’ 태동과 70년대 업스트림 투자로 산업 


사진 : 전후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패션의 진화, Fashion in Japan 1945-2020 전시 포스터 


# 일본 패션산업의 태동


한 나라의 산업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대학 입시를 위하여 역사 공부하듯이 단순히 연대별 중요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매트릭스로 구성된 산업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것과 비교하기도 좋고 학습으로부터 얻는 효과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서양 의류 역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짧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식 의복을 채택하긴 하였지만 이는 왕과 지배 계층인 관료들에 한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이 서양식 의복을 접한 건 2차 세계 대전 이후 빠르게 확산됐다.


사진: 일본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1년부터 3년간 구미 12개국을 순방했던 일본 이와쿠라 사절단. 사절단의 정사였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 具視는 일본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내세우면서 상투와 기모노를 입은 모습으로 도항을 했다. 이 모습은 미국의 신문 삽화에도 남아있다. (위의 사진) 그러나 당시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아들에게 “미개 국가로 멸시를 받는다”고 설득당하여, 시카고에서 삭발하고, 이후 순방에서는 서양복식을 차려 입었다. 이 사진이 기록에 남은 최초의 양복을 입은 일본인들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 두번째 인물이 부사로 사절단에 참가한 30대 초반의 이토 히로부미.


1894년 조선이 갑오경장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서양복식을 채택한 한반도 역사보다 일본이 20여년 가량 앞서긴 했지만 일본이나 조선이나 일반 국민들은 2차대전 이후 미군에 의한 미국 문화 전파에서 비롯되었다.

오랫동안 민족 복식을 채택하던 아시아의 국가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복장의 자유는 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전제 복식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들도 유행하는 의류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면서 일본은 국가가 나서서 전통을 떨치고 서양 디자인에 더 중점을 두고 패션을 기간 사업으로 확립하기 위해 움직였다.


전쟁 이후 50여년 동안 일본의 패션 산업은 주로 유럽에서 패션 크리에이션을 배우고 미국에서 비즈니스 방식을 배우면서 비약적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일본 패션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다른 것은 무엇이고 유사한 건 무엇인가?


1950년대 일본 섬유 산업은 국가 주요 기간 산업으로 전후 복구에 필요한 외화 벌이 핵심 산업으로 지정됐다. 이 과정에 도쿄의 아카사카에서 1919년 기모노 제작을 위한 기능공 양성학교로 설립한 문화복장학원이 1923년 서양복식 제작을 위한 봉제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로 탈바꿈한 후 패전 후 서양식 의류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이 학교 출신들이 주도하여 일본의 패션 산업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 당시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기성복 산업으로의 전환 기반을 제공했다. 동시에 일본 백화점 체인들은 조선과 달리 17세기 에도시기부터 서구와의 교류를 통한 근대식 유통의 경험이 있었고, 이미 제국시절인 1904년 미스코시 백화점과 같은 현대식 백화점이 개점하면서부터 서양의 백화점 비즈니스를 학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후 일본 백화점들은 파리의 오트 쿠튀르와 제휴를 모색했다.


또 패션 산업의 기반인 소재 산업 측면에서는 전쟁 전 기반이 닦여진 섬유 업체를 중심으로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터 소재들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수준으로 미국이나 독일 등의 섬유산업과 궤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패션 산업의 토대가 1980년대 블랙 센세이션이라 부르던 재팬스타일 시대를 제공했다.

 

사진: 1914년 도쿄 니혼바시에 태어난 현대식백화점 미스코시 니혼바시점의 현재 모습


1960년대 고도성장기에 일본의 기성복 산업은 봉제업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고, 대기업군에 패션 기업들이 다수 등장한다. 대기업 봉제산업은 니트웨어 붐이 주도했다. 이때 일본의 봉제 산업의 넘치는 물량이 한국으로 이월되면서 70년대 봉제 산업 기틀을 제공했다.

 

# 패션스쿨 등장과 유통·소재 산업의 기초


1965년 모리 하나에(Hanae Mori)가 뉴욕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고 이시기 일본에서는 아이비 룩(IVY Look)이 유행했다. 그러나 일본 패션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촉발한 것은 미국식 패션사업 모델의 도입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정부는 패션 인재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이들에 의해 당시 패션 산업이란 용어조차 정립되지 못했던 일본에 본격적인 패션 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1968년 일본 패션사에 큰 방점을 찍은 일이 발생하는데 미국 Wiley 출판에서 출간해 FIT 교과서로 사용한 <Inside the Fashion Business>(1965년 Jeanette A. Jarnow, Beatrice Judelle 공저)라는 책이 일본어판으로 당시 대표적인 섬유기업인 아사히 화성(Asahi Chemical Industry Co, 현재 Asahi Kasei Corp)에서 출판, 일본 섬유 패션 업계에 보급한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패션 비즈니스’를 대체할 적절한 일본어 용어조차 없던 시기에 일본 산업계는 이때 패션 비즈니스란 외국어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이 사소한(?) 일이 일본의 패션 비즈니스가 전세계로 나아가는 계기를 촉발시켰다.


이 책의 저자들은 패션이 디자인의 영역을 초월해 사업과 결합하면 주요한 산업이 될 잠재력이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부분을 일본 정책당국자들은 간과하지 않았고 이런 사소한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일본 패션 산업은 1970년대 이후 고도 성장의 길로 들어선다.

 

사진: 1965년 inside the fashion business 초판본. 2000년대 초 주저자인 Jeannette A. Jarnow가 Kitty G. Dickerson 과 개정판을 발간하여서 국내에서 번역본도 나왔지만 60년전의 초판이 준 감흥에는 미치지 못한다.


1970년대는 일본 패션 산업의 고도 성장기였다. 1971년 대형 출판사인 슈에이사集英社 <Nonno>나 매거진하우스의 <Anan>을 필두로 수많은 패션 잡지가 발행 되었고 이들 잡지가 펼치는 라이프스타일에 의존하는 여성들을 일컬어 안논족(アンノン族)이라고 불렀다.


1970년 초반부터 일본의 의류 회사들은 본격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브랜드 라이선스십을 맺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패션이 빠르게 침투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패션 업계를 이끄는 리더십은 유행 상품을 개발하는 위험 부담 관행을 안고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패션 브랜드사가 갖고 있었다.


기존과 다른 이러한 변화는 다른 나라 패션 유통 관행과는 차이가 있는 백화점 위탁 구매 모델과 같은 일본식 사업 시스템을 낳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의류산업 자체에 있어서 1970년대 그 당시 시급한 문제는 패션사업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0년 아사히 케미칼은 뉴욕 FIT와 협력해 패션 비즈니스 세미나를 개최했다. 소재 회사들이 다운스트림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의 단면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그 후 30여년 넘게 업스트림과 미드스트림 지원으로 일본 업계에서 10,000명 이상이 유럽과 미국의 패션 사업 모델을 학습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10년 동안 일본 의류 소매 시장은 4조 엔에서 10조 엔 이상으로 2.5배 성장했다.


# 70년대 업·미들 스트림 투자로 화려한 80년대 맞아


일본 패션사에서 1980년대는 다각화와 정교함의 시대였다. 패션 산업의 매력은 수많은 인재들과 자본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독특한 브랜드를 잇따라 만들어 DC(Designer Character) 시대로 각인을 남겼다.

1970년대에 다카다 겐조와 미야케 이세이가 이끄는 일본 디자이너들이 파리 컬렉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뒤를 이어 가와쿠보 레이와 야마모토 요지는 1981년에 Black Shock와 Rag Look으로 화제가 되면서 세계 패션 시장에 일본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5년 당시 G5 재무장관들의 플라자 합의로 인해 엔화 가치가 급등하고, 그에 따라 일본에서 자산이 부풀어 오른 버블 경제의 여파로 저가 제품의 수입이 늘어나고 로컬 생산 기반에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해외의 럭셔리 브랜드들의 일본 시장 난도질을 가속화시켰다.


1990년대는 버블 경제의 붕괴와 가격 파괴 현상의 증가로 일본 패션 사업 구조가 가장 많이 변화한 시기였다. 고비용 유통 구조 변화에 대한 시장 요구가 많았고, 유니클로(UNIQLO)와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모든 종류의 양말을 팔고 있는 타비오(Tabio)로 대표되는 ‘제조업체-소매업체가 수직 통합한’ 사업 모델이나, 아오야마 상사나 알펜 같은 카테고리 킬러 전문 할인점, 패션에 민감한 소프트 셀렉트 숍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사업이 등장했다.


이러한 무드를 반영한 용어들이 저렴하고 세련된 느낌의 cheap chic이나 가격 이미지가 주도하는 가성비의 real clothes,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본 패션을 대변하는 청춘들이 주도한 street fashion이 이 시기에 등장한다. 1990년대말 Shibuya109나 Urahara가 스트리트 패션 붐의 중심지가 되었고, 당시엔 하위 문화로 치부하던 것이 패션계의 주류로 부상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사진: URAHARA style의 일본 젊은이들 , 사진 제공 : Tokyo Fashion.com


1970년대 아사히 카세이 같은 업스트림 섬유업체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산업 교육의 정신은 1992년 도쿄에 설립된 Institute for the Fashion Industries(IFI)에서 계승된다. 세계화, 기술 혁신,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다양화처럼 패션 산업을 둘러싼 환경을 어지러운 속도로 계속 변화시키는 요인에 대응하고 국제적 시각을 가진 전문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일본 패션업계는 국가, 지자체, 기업의 지원을 받아 패션산업발전기구(Fashion Industry Development Organization)를 설립했다.


IFI Business School은 이 재단이 운영하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형태의 비즈니스 스쿨이다. 이 재단의 구성원은 400개가 넘는 일본 섬유패션기업들과 도쿄도 정부 그리고 국가기관인 경제통산성이 함께 하고 30여년을 지속적으로 전통 산업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국내의 섬유 패션 단체들이나 정부기관이 배워야 할 점이라 생각 한다.


그림: 도쿄 Institute for the Fashion Industries(IFI)의 전문가 양성 코스 맵.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 섬유, 패션 관련 교육과정과는 커리큘럼이나 과정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작은 차이가 산업의 흥망을 결정 짓는 요소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일본의 패션 산업도 무한 글로벌 경쟁과 멀티채널링의 시대로 돌입한다. 2000년대 뉴밀레니엄과 함께 침체된 패션 시장에 직면한 유럽과 미국의 럭셔리 브랜드들은 일본 시장에서 전례없던 공격적인 마케팅 캠페인을 시작했다.


반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상품의 바다에 휩쓸린 일본의 패션 소비자들은 90년대 추구하던 물질적 가치 외에도 낯선 감성적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매장을 고객들이 흥분하는 공간, 소비자와의 감정을 교환하는 장소로 바꾸는 것이 일본에서 중요해졌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지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미나페르호넨(minä perhonen, 지금 ddp에서 전시중인 100년이 지나도 좋은 디자인의 그 미나페르호넨이 맞다)의 미나가와 아키라나 다카하시 준과 같이 소재의 독창성과 디자인의 새로운 개념을 결합한 패션을 만드는 패션 크리에이터들이 일본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눈에 띄게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DDP에서 전시 중인 미나가와 아키라의 minä perhonen 전시 포스터. 관객들의 호응으로 3월 16일까지 전시가 연장되었으니 이 글을 보는 순간 DDP로 뛰어 가길 권한다. 패션은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산업임을 깨닫게 해준다.

사진** Jun Takahashi의 2024 F/W, 늘 소재에서부터 개성을 드러내는 다카하시의 컬렉션


50여년간 일본의 패션산업이 어떻게 세계로 나갔고 어떻게 침체했는 지를 짧게 학습했다. 다음 3부에서는 잃어버린 30년간 처절한 그들의 투쟁방식을 학습하면서 우리에게도 곧 닥칠 위기 극복의 열쇠를 머리 맞대고 고민해 보자.

< 3부에서 계속 >


김묘환은 30여년간 기업들(정확히는 오너들)의 아픈 부분을 가감 없이 직설해 온 국내 대표적인 패션경영 컨설턴트. 경영자들은 때론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시장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으로 인해 ‘난관에 빠졌을 때 같이 식사하고 싶은 1순위 꼰대’로 신뢰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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