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토리안[패션투자] 사모펀드, 한국發 글로벌 브랜드 키울 수 있을까?

하성호 디토리안
2025-03-13

사모펀드, 한국發 글로벌 브랜드 키울 수 있을까?

佛 에르메스 ‘Shang Xia’ 사례와 우리의 방향


출처: SHANG XIA의 티백


패션 산업은 매력적이면서도 난이도가 높은 투자 대상이다. 브랜드는 소비자 감성에 따라 가치가 급격히 변동하며, 고급 브랜드로 자리 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다른 어떤 산업보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된다. 높은 마진 구조와 브랜드 파워가 결합되면 기업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전통적인 금융 기법이 적용되지 않는 산업이기도 하다. 비용 절감이나 단순한 사업 구조 개편만으로는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수 없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모펀드(PEF)는 패션 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글로벌 패션 브랜드를 키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힌트는 ‘Shang Xia’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Shang Xia, 투자자 손으로 럭셔리 브랜드 도전


2010년,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는 중국 럭셔리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브랜드로 Shang Xia를 설립했다. 기존의 서구 명품 브랜드들과 차별화하여, 중국의 전통 공예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제품군도 패션을 넘어 가구, 도자기, 액세서리 등으로 넓혔다. 그러나 시장 반응은 기대만큼 뜨겁지 않았다.


Shang Xia의 혁명적인 작품인 대천지 탄소 섬유 의자, 고전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가 통합되어 상샤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소비자들은 Shang Xia를 럭셔리 브랜드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전통 공예를 강조했지만, 이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데는 기여했을 지 몰라도, 명품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성'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럭셔리 브랜드는 단순한 고급 제품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문화적 자산을 소비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이 고급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은 마케팅 능력만 뛰어나서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지속된 브랜드 유산(heritage) 덕분인 것은 초등학생도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 이탈리아의 투자회사 Exor가 Shang Xia를 인수했다. Exor는 이탈리아 아녤리(Agnelli) 가문이 운영하는 글로벌 투자사로 페라리(Ferrari), 스텔란티스(Stellantis), 유벤투스(Juventus) 등 고급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페라리를 통해 명품 브랜드로서 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실행한 경험이 있다. 패션 기업을 운영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페라리를 통해 ‘브랜드 가치 창출’의 노하우를 Shang Xia에 적용하려는 계획이었다.


Shang Xia의 2021년 파리패션위크 데뷔무대


Exor의 투자 후, Shang Xia는 빠르게 변화를 시도했다. 브랜드 정체성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며, 유통 전략을 새롭게 짰다. 기존 중국 전통 공예를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 있는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LVMH 프라이즈 수상자인 양 리(Yang Li)를 영입했다. 또한 기존 의류 및 공예품에 국한된 카테고리를 가방, 신발, 향수 등 보다 상업적인 제품군으로 확장하며 수익성을 높이려 했다. 유통 전략에서도 변화를 주어 2021년 파리 패션위크에 참가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은 높다. 명품 시장에서 소비자 신뢰를 얻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은 수십 년, 길게는 백 년 이상의 역사를 바탕으로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Shang Xia는 상대적으로 신생 브랜드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더욱이 중국에서도 여전히 서구 명품 브랜드들이 강력한 선호도를 유지하고 있다.


# 한국 패션 브랜드는 글로벌로 갈 수 있을까?


Shang Xia 상하이 플래그십스토어, 출처 SHANG XIA

Shang Xia 사례는 한국 패션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한국의 패션 브랜드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럭셔리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브랜드는 없다. 브랜드 스토리를 갖춘 기업들이 있지만, 이를 글로벌 수준으로 확장하는 전략이 부족하다.


한국 패션 브랜드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단순한 의류 브랜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일 제품군만으로는 소비자의 반복 구매를 유도하기 어렵고, 브랜드의 수익성도 제한된다. 샤넬, 루이비통 같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단순한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판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한국 패션 브랜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


Shang Xia가 Exor의 투자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할 기회를 얻은 것처럼, 한국에서도 패션산업을 글로벌화 하기 위해서는 PEF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한국에서 글로벌 패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PEF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다. PEF는 브랜드에 투자하고, 전략을 재정비하고, 스케일업을 위한 자본을 공급할 수 있다. 하지만 패션 산업의 본질적인 특성상, 단순한 투자로는 한계가 있다. 메이저 기업이 보유한 유통망과 운영 역량이 필수적이다. 한국에서 PEF가 단독으로 패션 브랜드를 인수하고,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유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PEF와 레거시 패션기업들이 협력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패션산업은 규모의 경제와 브랜드 가치 창출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성공할 수 있는 시장이다. 그렇다면 가장 현실적인 모델은 무엇일까?

PEF는 브랜드를 발굴하고 초기 투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무작정 신생 브랜드를 키우기보다, 매출 100억~500억원 사이의 ‘스케일업 직전’ 브랜드를 타겟으로 삼아야 한다. 자본을 투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영 전략, 유통 채널 확장, 제품 포트폴리오 조정 등 밸류업 전략을 함께 실행해야 한다.

국내 메이저 패션기업은 유통망과 운영 노하우를 제공해야 한다. 브랜드가 빠르게 확장할 수 있도록 기존 백화점, 편집숍, 이커머스 채널을 활용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글로벌 리테일 네트워크와 협력이 필요하다. Farfetch, SSENSE, Net-a-Porter 같은 명품 플랫폼과의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하며, 해외 오프라인 매장 진출도 고려해야 한다.


# K패션, ‘한국에서 탄생한 글로벌 브랜드’로


WOOYOUNGMI 파리 플래그십스토어 


Shang Xia가 Exor의 투자와 함께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글로벌 패션 브랜드를 탄생시키려면, 개별 기업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PEF, 대기업, 글로벌 유통사들이 하나의 가치사슬을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K-패션’이 아니라, ‘한국에서 탄생한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제는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우리나라에는 보석 같은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글로벌 무대에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감각과 창의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본, 유통, 브랜드 구축 지원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제는 이들이 더욱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도전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저자인 하성호 와이유파트너스 대표는 오는 4월 11일 한국패션협회가 주최하는 [창립 40주년 기념 글로벌 패션 포럼]에 패널로 참여한다. ‘K-패션 브랜드 성장 요건, 투자와 협업’을 주제로 전문 투자자로서  패션 브랜드의 성장을 지원할 인사이트를 전달할 예정이다.  


하성호 CFA는 가능성을 설계하고 성장을 디자인하는 사모펀드 와이유파트너스의 대표다. 투자와 기업 성장을 연결하는 전략적 안목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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