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간의 흔적이 곧 럭셔리다
로에베(LOEWE), 제주도 공예가 손맛에서 럭셔리 재정의

르메르가 칠레 출신 아티스트 카를로스 페냐피엘(카를로스 백을 런칭한 아티 스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순회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4월 3~30일까지 상하 이 우캉로 르메르 플래그십스토어에서 진행 중이다.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LOEWE)는 매년 전 세계 공예가를 대상으로 국제 공모전인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Foundation Craft Prize)’을 개최하고 있다. 우승 상금 5만 유로(약 7,000만 원)라는 규모보다, 이 상이 현대 공예계에서 갖는 권위와 영향력이 훨씬 크다.
지난 2022년, 전 세계 116개국 3,10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은 한국 제주 출신 정다혜 공예가였다. 제주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제주 지역의 500년 전통 ‘말총 공예’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다혜 작가는 로에베 재단의 지원으로 2026년 9월부터 10월까지 스페인 마요르카 ‘벨몬드 호텔 라 레시덴시아’ 레지던시에 초대됐다. 오랜 역사를 지닌 데이아(Deià) 예술 공동체에서 그녀가 새롭게 엮어낼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제주도의 말총이 스페인의 밝은 햇살 아래 또 다른 미래를 향한 작품으로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 말총으로 엮어낸 ‘시간의 구조’
정다혜 공예가의 작품 제목은 <성실의 시간(A Time of Sincerity)>이다. 작가는 제주 말의 갈기와 꼬리털인 ‘말총’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조선 시대 갓이나 망건을 만들 때 쓰이던 말총 공예는 오늘날 그 명맥이 거의 끊겨가고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The Finalists of the LOEWE FOUNDATION Craft Prize 2022(정다혜 공예가)
이 작품은 사라져가는 기술을 단순히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고된 반복 작업은 수주에서 수개월에 이르는 시간을 요구한다. 그렇게 축적된 시간은 ‘투명한 구조를 가진 항아리’라는 물질로 형상화된다. 바구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빛과 밀도, 그리고 공예가가 견뎌낸 인내와 노력이라는 시간이 담겨 있다.
# 왜 럭셔리 브랜드는 공예를 주목하는가
로에베 같은 글로벌 패션 하우스는 왜 도자기, 목공, 유리, 그리고 말총 공예까지 아우르는 공모전에 주목하는 것일까? 답은 명확하다. 공예는 곧 럭셔리 산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846년 마드리드의 작은 가죽 공방에서 시작된 로에베에게 공예는 브랜드의 기원이자 정체성 그 자체다. 따라서 이 공모전은 단순한 홍보 이벤트가 아니다. 브랜드의 뿌리를 현재와 연결해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고도의 브랜딩 활동이다.
로에베 공예상의 심사 기준은 명확하다. 기술(Skill), 혁신(Innovation), 그리고 예술성(Artistic Merit). 특히 전통 기술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맥락으로 어떻게 변형했는지를 엄격하게 평가한다.
정다혜 작가는 전통 재료인 말총을 사용하면서도, 그 조형미를 미래적인 건축적 구조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평가를 받았다.
# AI 시대, 가장 강력한 차별화로서의 공예
디자이너 알투자라의 대담한 프린트물(좌)과 WGSN AI 이미지(우)
정다혜 작가가 수만 번의 손길을 거치며 유지하는 미세한 긴장감, 재료와 사투를 벌이는 과정, 그리고 반복 속에서 축적되는 육체적 고통의 서사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다.
공예는 곧 시간을 드러내는 기술이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성실함’이 축적된 공예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제주라는 지역성과 역사성을 품은 정다혜 공예가의 작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안에 담긴 인류 보편의 가치인 ‘시간의 정성’ 때문이다.
# AI 시대, 인간의 흔적을 드러내야만 한다
패션 산업은 지금 중요한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기술과 AI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디자인 과정과 구현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동시에 정반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손의 감각과 물질적 촉감을 다시 강조하는 트렌드다.
트렌드 리서치 기관 WGSN은 이를 “Renaissance of Real(현실성의 르네상스)”라고 정의한다. 기술과 AI가 변화를 가속하는 동시에, 패션 산업에서는 촉각적 경험과 인간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끊임없이 연결된 디지털 환경 속에서, 오히려 ‘연결을 끊는 태도’ 자체가 새로운 럭셔리가 되고 있다. 연속되는 SNS 알림과 콘텐츠 과잉은 자연으로의 회귀, 수공예, 슬로우 라이프를 향한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

The Finalists of the LOEWE FOUNDATION Craft Prize 2022(정다혜 공예가)
오래된 제작 기술, 손으로만 구현할 수 있는 작업, 그리고 소재가 가진 진정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럭셔리 핸드백 디자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핸드백은 본질적으로 시간과 기술이 축적된 물건이다.
가죽을 재단하고, 엣지를 마감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스티치를 완성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인간의 손길이 개입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미묘한 차이와 흔적은 산업적 기준에서는 불완전함일 수 있지만, 럭셔리 세계에서는 오히려 핵심 가치가 된다.
럭셔리 브랜드일수록 가죽의 자연스러운 결을 숨기기보다 그대로 드러내고, 시간이 흐르며 나타나는 에이징(patina)을 중요하게 여긴다. 완벽한 균일함을 추구하는 산업 제품과 달리, 럭셔리 제품은 장인의 시간과 흔적이 축적되는 과정을 디자인 요소로 받아들인다.
AI 시대에 이러한 특징은 더욱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 AI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미지를 생성하고 완벽에 가까운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는 물질의 촉감이나 제작 과정이 담긴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WGSN 보고서가 지적하듯,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점점 더 정교하게 대체할수록,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임상덕 Lim, Sang-Deok
러브캣 인터내셔날 CCO(Chief Creative Officer), 디자인학 박사
2010년부터 2023년까지 글로벌 럭셔리 패션 브랜드 MCM에서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러브캣 인터내셔날에서 크리에이티브와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cco@lovcat.co.kr / @all_beyond_definition
https://www.facebook.com/sangdeok.lim.9
AI 시대, 인간의 흔적이 곧 럭셔리다
르메르가 칠레 출신 아티스트 카를로스 페냐피엘(카를로스 백을 런칭한 아티 스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순회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4월 3~30일까지 상하 이 우캉로 르메르 플래그십스토어에서 진행 중이다.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LOEWE)는 매년 전 세계 공예가를 대상으로 국제 공모전인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Foundation Craft Prize)’을 개최하고 있다. 우승 상금 5만 유로(약 7,000만 원)라는 규모보다, 이 상이 현대 공예계에서 갖는 권위와 영향력이 훨씬 크다.
지난 2022년, 전 세계 116개국 3,10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은 한국 제주 출신 정다혜 공예가였다. 제주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제주 지역의 500년 전통 ‘말총 공예’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다혜 작가는 로에베 재단의 지원으로 2026년 9월부터 10월까지 스페인 마요르카 ‘벨몬드 호텔 라 레시덴시아’ 레지던시에 초대됐다. 오랜 역사를 지닌 데이아(Deià) 예술 공동체에서 그녀가 새롭게 엮어낼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제주도의 말총이 스페인의 밝은 햇살 아래 또 다른 미래를 향한 작품으로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 말총으로 엮어낸 ‘시간의 구조’
정다혜 공예가의 작품 제목은 <성실의 시간(A Time of Sincerity)>이다. 작가는 제주 말의 갈기와 꼬리털인 ‘말총’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조선 시대 갓이나 망건을 만들 때 쓰이던 말총 공예는 오늘날 그 명맥이 거의 끊겨가고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사라져가는 기술을 단순히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고된 반복 작업은 수주에서 수개월에 이르는 시간을 요구한다. 그렇게 축적된 시간은 ‘투명한 구조를 가진 항아리’라는 물질로 형상화된다. 바구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빛과 밀도, 그리고 공예가가 견뎌낸 인내와 노력이라는 시간이 담겨 있다.
# 왜 럭셔리 브랜드는 공예를 주목하는가
로에베 같은 글로벌 패션 하우스는 왜 도자기, 목공, 유리, 그리고 말총 공예까지 아우르는 공모전에 주목하는 것일까? 답은 명확하다. 공예는 곧 럭셔리 산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846년 마드리드의 작은 가죽 공방에서 시작된 로에베에게 공예는 브랜드의 기원이자 정체성 그 자체다. 따라서 이 공모전은 단순한 홍보 이벤트가 아니다. 브랜드의 뿌리를 현재와 연결해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고도의 브랜딩 활동이다.
로에베 공예상의 심사 기준은 명확하다. 기술(Skill), 혁신(Innovation), 그리고 예술성(Artistic Merit). 특히 전통 기술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맥락으로 어떻게 변형했는지를 엄격하게 평가한다.
정다혜 작가는 전통 재료인 말총을 사용하면서도, 그 조형미를 미래적인 건축적 구조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평가를 받았다.
# AI 시대, 가장 강력한 차별화로서의 공예
정다혜 작가가 수만 번의 손길을 거치며 유지하는 미세한 긴장감, 재료와 사투를 벌이는 과정, 그리고 반복 속에서 축적되는 육체적 고통의 서사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다.
공예는 곧 시간을 드러내는 기술이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성실함’이 축적된 공예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제주라는 지역성과 역사성을 품은 정다혜 공예가의 작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안에 담긴 인류 보편의 가치인 ‘시간의 정성’ 때문이다.
# AI 시대, 인간의 흔적을 드러내야만 한다
패션 산업은 지금 중요한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기술과 AI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디자인 과정과 구현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동시에 정반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손의 감각과 물질적 촉감을 다시 강조하는 트렌드다.
트렌드 리서치 기관 WGSN은 이를 “Renaissance of Real(현실성의 르네상스)”라고 정의한다. 기술과 AI가 변화를 가속하는 동시에, 패션 산업에서는 촉각적 경험과 인간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끊임없이 연결된 디지털 환경 속에서, 오히려 ‘연결을 끊는 태도’ 자체가 새로운 럭셔리가 되고 있다. 연속되는 SNS 알림과 콘텐츠 과잉은 자연으로의 회귀, 수공예, 슬로우 라이프를 향한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
The Finalists of the LOEWE FOUNDATION Craft Prize 2022(정다혜 공예가)
오래된 제작 기술, 손으로만 구현할 수 있는 작업, 그리고 소재가 가진 진정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럭셔리 핸드백 디자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핸드백은 본질적으로 시간과 기술이 축적된 물건이다.
가죽을 재단하고, 엣지를 마감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스티치를 완성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인간의 손길이 개입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미묘한 차이와 흔적은 산업적 기준에서는 불완전함일 수 있지만, 럭셔리 세계에서는 오히려 핵심 가치가 된다.
럭셔리 브랜드일수록 가죽의 자연스러운 결을 숨기기보다 그대로 드러내고, 시간이 흐르며 나타나는 에이징(patina)을 중요하게 여긴다. 완벽한 균일함을 추구하는 산업 제품과 달리, 럭셔리 제품은 장인의 시간과 흔적이 축적되는 과정을 디자인 요소로 받아들인다.
AI 시대에 이러한 특징은 더욱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 AI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미지를 생성하고 완벽에 가까운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는 물질의 촉감이나 제작 과정이 담긴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WGSN 보고서가 지적하듯,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점점 더 정교하게 대체할수록,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임상덕 Lim, Sang-Deok
러브캣 인터내셔날 CCO(Chief Creative Officer), 디자인학 박사
2010년부터 2023년까지 글로벌 럭셔리 패션 브랜드 MCM에서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러브캣 인터내셔날에서 크리에이티브와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cco@lovcat.co.kr / @all_beyond_defin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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