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업의 본질은 더 이상 부동산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갑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도서관이 아닙니다. 쇼핑몰입니다.
故 이건희 회장은 평소 '업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야 사업 성공의 필수 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봤던 건데요. 그가 바라본 백화점 업의 본질은 부동산이었습니다. 부동산에서 중요한 것은 위치이고, 결국 입지가 백화점 점포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관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백화점 업의 본질 역시 바뀌게 된 것인데요. 이를 상징하는 것은 더현대 서울의 성공입니다. 여의도라는 성공 확률이 불확실한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여 최단기간 매출 1조원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더현대 서울은, 아예 여의도 상권 전체를 살리기까지 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8층 뉴스트리트 ‘이미스’ 매장 전경 ⓒ신세계
이처럼 백화점 업은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주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공간 비즈니스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제는 콘텐츠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면서 극적으로 변화한 것이 바로 백화점과 브랜드의 관계입니다. 전통적으로 백화점은 ‘갑’의 위치에 서 있었는데요. 이제는 백화점보다 오히려 브랜드가 우위에 서는 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 롯데와 샤넬의 전쟁, 흠집 나기 시작한 ‘갑’의 위상
사실 백화점과 브랜드의 대결은 나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서로 협력도 하고 갈등도 했지만, 아무래도 유통 업체가 우위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러한 관계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2008년에 있었던 롯데백화점과 ‘샤넬’의 자존심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샤넬’ 부티크(의류, 잡화) 매장이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은 놔둔 채,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에 단독으로 입점한다고 하면서, 둘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롯데백화점은 ‘샤넬’ 뷰티 매장의 위치 및 크기 조정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센텀시티점 입점 불발에 대한 보복 조치라는 해석이 뒤따랐고요. 뒤이어 ‘샤넬’이 롯데백화점 7개 점포에서 화장품 매장 철수를 선언하면서 둘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던 사건이 있었죠.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에서 시작된 샤넬과의 갈등은 약화된 백화점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비짓부산
다행히 그 이상의 확전은 없었지만, 롯데백화점과 ‘샤넬’이 화해한 것은 무려 3년 9개월이 지나서였습니다. 물론 명품 브랜드 모셔오기 관행은 이전부터 있긴 했는데요.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백화점이 항상 ‘갑’이 아니라는 것을 대중들도 인식하기 시작했고요.
이후 백화점과 명품 사이의 관계는 서서히 역전되어 갔고, 지금은 말할 것도 없이, 명품 브랜드들이 확실한 ‘갑’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명품 브랜드들은 지역 별로 매장의 수를 제한하는, '매장 총량제'를 실시하고 있는데요. 이를 가지고 백화점들을 사실상 길들이고 있습니다.
흔히 에루샤라고 불리는, ‘에르메스’, ‘루이뷔통’, ‘샤넬’ 매장 보유 유무에 따라 백화점의 급이 갈리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한데요. 이와 같은 명품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백화점들은 새로운 콘텐츠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재밌는 건 그 과정에서 전체 브랜드들의 위상마저 덩달아 높아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 급을 따지면, 뒤처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롯데와 ‘샤넬’이 극적으로 화해하고 2달 뒤인 2012년 9월, 다른 의미로 상징적인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스타일난다’가 롯데백화점 본점에 입점한 건데요. ‘스타일난다’는 1세대 온라인 쇼핑몰 브랜드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색조 화장품 브랜드 ‘3CE’의 성공을 바탕으로 로레알에 인수되면서 전설로 남기도 했고요.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스타일난다’의 백화점 입성은 당시만 해도 매우 충격적인 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온라인 브랜드들이 이미지 제고를 위해 오프라인 유통 점포 입점을 타진하던 일은 종종 있어왔는데요. 급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기존의 평가표 내에 존재하는 기성 브랜드들만 입점시키는 관행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겁니다.
'스타일난다'의 백화점 입성은 새로운 시대를 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롯데백화점
그래서 사실 당시 롯데백화점 내부에서도 ‘스타일난다’ 입점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브랜드 급을 운운하면서 끝까지 반대하던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고요. 하지만 롯데백화점은 절박했습니다. 명품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는 것은 물론, 젊은 고객들이 백화점을 외면하고 있었거든요. 온라인 브랜드는 이러한 2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감한 결단은 결국 큰 성공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픈 직후 1주 만에 매출 2억원을 달성하고, 이후로도 꾸준히 월 매출 9억원 수준을 유지한 건데요.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도 의미 있었지만, 무엇보다 백화점으로 젊은 고객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점도 매우 뜻깊은 포인트였습니다.
또한 이는 온라인 브랜드들에게도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동대문을 기반으로 하던 온라인 브랜드는 '싸구려'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요. 백화점이 가진 고급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그제야 온라인 기반 브랜드는 디자이너 브랜드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백화점과 브랜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제2의 ‘스타일난다’를 꿈꾸는 ‘사뿐’, ‘나인걸’ 등이 앞다퉈 백화점에 입점하기도 했고요.
# 이제는 백화점이 브랜드를 모셔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화점과 브랜드의 관계는 온라인 쇼핑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다시 한 번 급변하게 됩니다. 무신사, 29CM, W컨셉 등 온라인 편집샵의 등장과 함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파른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동시에 백화점 고객의 노후화가 다시 심화되면서, 백화점은 트렌드를 주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브랜드라고 인정받으려면 백화점에 입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백화점 입점 유무로 브랜드 여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신사 입점, 혹은 랭킹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한 성공의 지표로 대접받고 있는데요. 여기에 더해 백화점에 입점하면 '유행의 끝물이다'라는 인식마저 생기게 됩니다. 백화점이 힙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데요. 이러자 이제는 온라인 기반의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백화점 입점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급을 따지면 입점 유무를 결정하던 시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일례로 작년 6월 최초로 ‘마르디 메크르디’를 백화점에 입점시킨, 롯데백화점 바이어는 무료 석 달간 매주 화요일에 해당 브랜드 옷을 입고 매장을 찾아가는 수고를 감수했다고 하는데요. ‘마르디 메크르디’라는 이름 자체가 불어로 '화요일, 수요일'이라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렇게 백화점이 삼고초려로 디자이너 브랜드를 모셔가고 있습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화제성과 실적 모두를 잡을 수 있는 효자 콘텐츠입니다 ⓒ뉴시스
이렇게 디자이너 브랜드 몸값이 비싸진 건, 이들이 화제성과 실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더에러’처럼 팬덤을 거느린 브랜드는 입점하면서 고객을 줄 세우며 오픈런을 몰고 다니기도 하고요. 이를 일찌감치 포착한 더현대 서울은 무려 200여개의 국내 신진 브랜드를 선보이며, 에루샤 없이 1조원을 돌파한 최초의 백화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롯데뿐 아니라 신세계 백화점 역시 이러한 영패션 전문관을 주요 점포에 연이어 선보이고 있고요.
# 유통점은 입지 대신 이제 이미지를 팝니다
그렇다면 이제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 업체의 전성기는 완전히 끝나 버린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근래 들어 새로이 오픈한 점포들에서 어느 정도 반전의 실마리들이 보이고 있는데요. 혹시 더현대 서울과 스타필드 수원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들은 성수동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핫플레이스의 콘텐츠를 그대로 점포에 옮겨왔다는 점이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성수동’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한 건, 여기서 풍겨오는 힙한 이미지 자체가 과거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 업체가 가졌던 입지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스타필드 수원은 성수의 감성을 그대로 가져오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신세계
과거의 입지가 물리적인 위치와 접근성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무형적인 감성에 따라 입지의 경쟁력이 결정됩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출점 전략도 변화해 왔는데요. 본래 유통업체는 전통적으로 상권이 발달한 도심에 위치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조금 더 교외로 나가더라도,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를 배치하여, 몰링 기반의 경험을 주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는데요. 최근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문화와 감성적인 측면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타필드 수원이 서울까지 가지 않고도 성수의 힙함과 트렌디함을 보다 가까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면 고객을 모으듯이 말입니다.
특히 더현대 서울은 아예 ‘팝업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개척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요. 이를 통해 단숨에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이를 더현대 대구 등으로 이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어, 유통 업체가 다시 무형적인 입지의 우위를 갖춘다면, 다시 갑의 자리를 되찾을지도 모릅니다. 콘텐츠가 좋아서, 방문하는 곳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콘텐츠라서 주목받는 시대가 된다면 힘의 우위는 다시 뒤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작가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트렌드라이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커머스 버티컬 뉴스레터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brunch.co.kr/@trendlite
백화점 업의 본질은 더 이상 부동산이 아닙니다
도서관이 아닙니다. 쇼핑몰입니다.
故 이건희 회장은 평소 '업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야 사업 성공의 필수 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봤던 건데요. 그가 바라본 백화점 업의 본질은 부동산이었습니다. 부동산에서 중요한 것은 위치이고, 결국 입지가 백화점 점포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관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백화점 업의 본질 역시 바뀌게 된 것인데요. 이를 상징하는 것은 더현대 서울의 성공입니다. 여의도라는 성공 확률이 불확실한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여 최단기간 매출 1조원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더현대 서울은, 아예 여의도 상권 전체를 살리기까지 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8층 뉴스트리트 ‘이미스’ 매장 전경 ⓒ신세계
이처럼 백화점 업은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주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공간 비즈니스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제는 콘텐츠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면서 극적으로 변화한 것이 바로 백화점과 브랜드의 관계입니다. 전통적으로 백화점은 ‘갑’의 위치에 서 있었는데요. 이제는 백화점보다 오히려 브랜드가 우위에 서는 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 롯데와 샤넬의 전쟁, 흠집 나기 시작한 ‘갑’의 위상
사실 백화점과 브랜드의 대결은 나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서로 협력도 하고 갈등도 했지만, 아무래도 유통 업체가 우위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러한 관계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2008년에 있었던 롯데백화점과 ‘샤넬’의 자존심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샤넬’ 부티크(의류, 잡화) 매장이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은 놔둔 채,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에 단독으로 입점한다고 하면서, 둘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롯데백화점은 ‘샤넬’ 뷰티 매장의 위치 및 크기 조정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센텀시티점 입점 불발에 대한 보복 조치라는 해석이 뒤따랐고요. 뒤이어 ‘샤넬’이 롯데백화점 7개 점포에서 화장품 매장 철수를 선언하면서 둘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던 사건이 있었죠.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에서 시작된 샤넬과의 갈등은 약화된 백화점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비짓부산
다행히 그 이상의 확전은 없었지만, 롯데백화점과 ‘샤넬’이 화해한 것은 무려 3년 9개월이 지나서였습니다. 물론 명품 브랜드 모셔오기 관행은 이전부터 있긴 했는데요.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백화점이 항상 ‘갑’이 아니라는 것을 대중들도 인식하기 시작했고요.
이후 백화점과 명품 사이의 관계는 서서히 역전되어 갔고, 지금은 말할 것도 없이, 명품 브랜드들이 확실한 ‘갑’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명품 브랜드들은 지역 별로 매장의 수를 제한하는, '매장 총량제'를 실시하고 있는데요. 이를 가지고 백화점들을 사실상 길들이고 있습니다.
흔히 에루샤라고 불리는, ‘에르메스’, ‘루이뷔통’, ‘샤넬’ 매장 보유 유무에 따라 백화점의 급이 갈리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한데요. 이와 같은 명품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백화점들은 새로운 콘텐츠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재밌는 건 그 과정에서 전체 브랜드들의 위상마저 덩달아 높아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 급을 따지면, 뒤처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롯데와 ‘샤넬’이 극적으로 화해하고 2달 뒤인 2012년 9월, 다른 의미로 상징적인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스타일난다’가 롯데백화점 본점에 입점한 건데요. ‘스타일난다’는 1세대 온라인 쇼핑몰 브랜드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색조 화장품 브랜드 ‘3CE’의 성공을 바탕으로 로레알에 인수되면서 전설로 남기도 했고요.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스타일난다’의 백화점 입성은 당시만 해도 매우 충격적인 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온라인 브랜드들이 이미지 제고를 위해 오프라인 유통 점포 입점을 타진하던 일은 종종 있어왔는데요. 급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기존의 평가표 내에 존재하는 기성 브랜드들만 입점시키는 관행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겁니다.
'스타일난다'의 백화점 입성은 새로운 시대를 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롯데백화점
그래서 사실 당시 롯데백화점 내부에서도 ‘스타일난다’ 입점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브랜드 급을 운운하면서 끝까지 반대하던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고요. 하지만 롯데백화점은 절박했습니다. 명품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는 것은 물론, 젊은 고객들이 백화점을 외면하고 있었거든요. 온라인 브랜드는 이러한 2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감한 결단은 결국 큰 성공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픈 직후 1주 만에 매출 2억원을 달성하고, 이후로도 꾸준히 월 매출 9억원 수준을 유지한 건데요.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도 의미 있었지만, 무엇보다 백화점으로 젊은 고객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점도 매우 뜻깊은 포인트였습니다.
또한 이는 온라인 브랜드들에게도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동대문을 기반으로 하던 온라인 브랜드는 '싸구려'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요. 백화점이 가진 고급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그제야 온라인 기반 브랜드는 디자이너 브랜드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백화점과 브랜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제2의 ‘스타일난다’를 꿈꾸는 ‘사뿐’, ‘나인걸’ 등이 앞다퉈 백화점에 입점하기도 했고요.
# 이제는 백화점이 브랜드를 모셔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화점과 브랜드의 관계는 온라인 쇼핑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다시 한 번 급변하게 됩니다. 무신사, 29CM, W컨셉 등 온라인 편집샵의 등장과 함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파른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동시에 백화점 고객의 노후화가 다시 심화되면서, 백화점은 트렌드를 주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브랜드라고 인정받으려면 백화점에 입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백화점 입점 유무로 브랜드 여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신사 입점, 혹은 랭킹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한 성공의 지표로 대접받고 있는데요. 여기에 더해 백화점에 입점하면 '유행의 끝물이다'라는 인식마저 생기게 됩니다. 백화점이 힙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데요. 이러자 이제는 온라인 기반의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백화점 입점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급을 따지면 입점 유무를 결정하던 시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일례로 작년 6월 최초로 ‘마르디 메크르디’를 백화점에 입점시킨, 롯데백화점 바이어는 무료 석 달간 매주 화요일에 해당 브랜드 옷을 입고 매장을 찾아가는 수고를 감수했다고 하는데요. ‘마르디 메크르디’라는 이름 자체가 불어로 '화요일, 수요일'이라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렇게 백화점이 삼고초려로 디자이너 브랜드를 모셔가고 있습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화제성과 실적 모두를 잡을 수 있는 효자 콘텐츠입니다 ⓒ뉴시스
이렇게 디자이너 브랜드 몸값이 비싸진 건, 이들이 화제성과 실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더에러’처럼 팬덤을 거느린 브랜드는 입점하면서 고객을 줄 세우며 오픈런을 몰고 다니기도 하고요. 이를 일찌감치 포착한 더현대 서울은 무려 200여개의 국내 신진 브랜드를 선보이며, 에루샤 없이 1조원을 돌파한 최초의 백화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롯데뿐 아니라 신세계 백화점 역시 이러한 영패션 전문관을 주요 점포에 연이어 선보이고 있고요.
# 유통점은 입지 대신 이제 이미지를 팝니다
그렇다면 이제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 업체의 전성기는 완전히 끝나 버린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근래 들어 새로이 오픈한 점포들에서 어느 정도 반전의 실마리들이 보이고 있는데요. 혹시 더현대 서울과 스타필드 수원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들은 성수동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핫플레이스의 콘텐츠를 그대로 점포에 옮겨왔다는 점이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성수동’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한 건, 여기서 풍겨오는 힙한 이미지 자체가 과거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 업체가 가졌던 입지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스타필드 수원은 성수의 감성을 그대로 가져오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신세계
과거의 입지가 물리적인 위치와 접근성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무형적인 감성에 따라 입지의 경쟁력이 결정됩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출점 전략도 변화해 왔는데요. 본래 유통업체는 전통적으로 상권이 발달한 도심에 위치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조금 더 교외로 나가더라도,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를 배치하여, 몰링 기반의 경험을 주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는데요. 최근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문화와 감성적인 측면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타필드 수원이 서울까지 가지 않고도 성수의 힙함과 트렌디함을 보다 가까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면 고객을 모으듯이 말입니다.
특히 더현대 서울은 아예 ‘팝업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개척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요. 이를 통해 단숨에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이를 더현대 대구 등으로 이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어, 유통 업체가 다시 무형적인 입지의 우위를 갖춘다면, 다시 갑의 자리를 되찾을지도 모릅니다. 콘텐츠가 좋아서, 방문하는 곳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콘텐츠라서 주목받는 시대가 된다면 힘의 우위는 다시 뒤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작가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트렌드라이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커머스 버티컬 뉴스레터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brunch.co.kr/@trendl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