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패션, ‘잘 파는 브랜드’ 넘어 ‘반복 성장하는 시스템’ 만들어라
디지털 생태계의 경쟁은 BM과 생태계, 공급망에서 결정된다
플랫폼 권력 이동부터 SHEIN OS, BAMP와 Sourcing OS까지…K-패션 성장 공식 제안

정인기 디토앤디토 대표 강연 내용 중
K-패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마뗑킴, 마르디 메크르디,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를 비롯한 국내 브랜드들이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넘어 글로벌 소비자와 직접 만나기 시작했고, 무신사와 29CM 같은 패션 플랫폼 역시 국내 브랜드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브랜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K-패션의 지속적인 글로벌 성장을 낙관하기에는 시장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지금 패션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본질은 단순한 온라인 전환이 아니다. 시장과 채널의 경계가 사라지고 플랫폼과 브랜드, 유통과 제조, 콘텐츠와 커머스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경쟁의 단위 자체가 바뀌고 있다. 과거 브랜드가 같은 조닝의 브랜드와 경쟁했다면 이제는 플랫폼의 데이터와 물류, 콘텐츠와 공급망, 그리고 이를 하나의 비즈니스모델(BM)로 묶어낸 ‘생태계’와 경쟁해야 한다.
지난 9월 16일 서울대학교 패션산업 최고경영자과정(AFB)에서 정인기 DITO&DITTO 발행인이 진행한 「디지털 & 글로벌 이커머스 시대, K패션 스케일업을 위한 공급망 혁신」 특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AFB는 2002년 개설된 국내 최초의 패션·섬유산업 특화 최고경영자 교육과정으로, 2026년 제26기까지 약 1,200명의 산업계 경영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가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정 대표가 던진 질문은 ‘앞으로 어떤 브랜드가 뜰 것인가’가 아니었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우리 기업의 본질은 무엇이며, 브랜드의 성장 속도를 뒷받침할 운영체계는 준비돼 있는가”였다.
# 272조원 온라인시장…경쟁 단위가 ‘브랜드’에서 ‘생태계’로 바뀌었다

서울대학교 패션산업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
한국 소비시장은 이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단계에 들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국내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약 272조원 규모로 확대됐다. 온라인은 더 이상 오프라인을 보완하는 판매채널이 아니라 소비자가 상품을 발견하고 비교하고 구매하는 거대한 시장 인프라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장을 움직이는 권력의 변화다. 쿠팡은 2025년 Product Commerce 부문에서 295억 9,200만달러, 한화 약 41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4분기 Product Commerce Active Customer는 2,460만명으로 전년보다 8% 증가했다. 네이버의 2025년 커머스 부문 매출은 3조 6,884억원으로 26.2% 증가했으며 스마트스토어 연간 거래액도 10% 성장했다. 카카오의 2025년 커머스 통합 거래액 역시 10조 6,000억원으로 전년보다 6% 늘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을 단순히 ‘온라인 유통업체’로 묶으면 변화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쿠팡은 커머스와 물류, 멤버십을 결합하고 네이버는 검색과 콘텐츠, AI 추천, 커머스와 결제를 연결한다. 카카오는 메신저라는 소비자 접점에 선물하기와 커머스를 결합한다. 같은 상품을 판매하더라도 고객을 확보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수익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결국 디지털 생태계의 경쟁은 상품 대 상품을 넘어 BM 대 BM의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

패션시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빠르다. 29CM는 2025년 10월 연간 누적 거래액 1조원을 돌파했고, 무신사 인수 이후 거래액은 3배 이상 확대됐다. 무신사 글로벌 스토어 역시 같은 달 MAU 500만 명을 넘어섰고 거래액은 전년 동월보다 158% 증가했다.
패션 플랫폼은 이제 브랜드를 모아놓고 수수료를 받는 온라인 쇼핑몰을 넘어 소비자 데이터를 통해 브랜드를 발굴하고 콘텐츠로 노출하며, 오프라인과 글로벌 시장으로 성장을 확장하는 Brand Scale-Up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만큼 ‘어떤 생태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 것인가’가 중요해진 이유다.
# SHEIN이 바꾼 것은 ‘가격’이 아니라 패션을 만드는 방법이다

쉬인의 반응생산 시스템 [사진=쉬인 홈페이지]
디지털 생태계가 패션 비즈니스의 앞단을 바꿨다면 SHEIN은 그 변화를 제조와 공급망까지 확장했다. SHEIN을 단순히 ‘중국에서 싸게 만들어 세계에 파는 초저가 패션기업’으로 이해해서는 이 기업이 패션산업에 던진 핵심적인 질문을 놓치게 된다.
SHEIN의 혁신은 ‘패션의 소프트웨어화’에 있다. 전통적인 패션기업이 트렌드를 분석하고 판매량을 예측한 뒤 생산하는 Trend → Design → Forecast → Production → Sales 구조였다면, SHEIN은 초기 생산량을 SKU당 100~200개 수준으로 낮춰 시장 반응을 먼저 확인하고 판매가 검증된 상품을 빠르게 리오더하는 온디맨드 방식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K-패션이 주목해야 할 것은 SHEIN의 저가격이 아니라 얼마나 작게 시작하고, 얼마나 빨리 시장 반응을 읽으며, 판매가 확인된 상품을 얼마나 빨리 다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운영 방식이다. 결국 패션산업의 경쟁력이 정확한 Forecast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 Response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SHEIN이 던진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 브랜드가 커질수록 제조·소싱이 병목…‘공장 찾기’에서 Sourcing OS로

정인기 디토앤디토 대표 강연 내용 중
디지털 시대에도 브랜드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선택지가 무한대로 확대되고 검색과 SNS 알고리즘이 상품을 노출하는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단번에 기억할 수 있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시그니처 상품이 더욱 중요하다.
최근 K-패션의 성장도 이를 보여준다.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시그니처 상품, SNS를 통한 빠른 확산력을 갖춘 강소 브랜드들은 기존 대형 패션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시장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콘텐츠와 마케팅은 디지털을 통해 빠르게 확장될 수 있지만 생산 CAPA와 소재, 물류는 같은 속도로 늘어나지 않는다. 브랜드가 커질수록 품절과 과잉재고라는 상반된 문제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다.
정 대표가 대명화학의 브랜드 생태계를 BAMP 관점으로 해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BAMP는 Branding, Accelerate(SCM), Management(Commerce), Platform(BM·투자)을 연결해 브랜드의 반복적인 Scale-Up을 지원하는 성장 생태계를 의미한다. 브랜드 발굴과 마케팅에 그치지 않고 제조와 SCM, 커머스, 경영관리, 플랫폼과 투자까지 연결돼야 성장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패션기업이 거대한 생태계를 직접 구축할 필요는 없다. 현실적인 출발점은 Sourcing Portfolio다. 기존 글로벌 소싱의 질문이 ‘한국, 중국, 베트남 가운데 어디에서 더 싸게 만들 것인가’였다면 이제는 ‘어떤 상품을 어떤 공급망에 배치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한국은 샘플과 소량생산, DTP와 빠른 리오더를 활용한 Near-shoring과 Quick Response에 강점이 있다. 중국은 방대한 소재 생태계와 ODM 역량을 활용한 Development와 Flexible Scale, 베트남 등 동남아는 대량생산과 원가 경쟁력을 활용한 Scale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결국 글로벌 소싱은 ‘Cheapest Country’를 찾는 문제가 아니라 Portfolio Optimization의 문제다.
더 근본적인 혁신은 기업 내부의 데이터 흐름에서 시작된다. 고객의 검색과 판매, SNS 반응 데이터가 MD와 상품기획으로 연결되고, 수요 판단을 거쳐 Sourcing Control Tower에서 ODM·Quick Response·DTP 생산을 결정해야 한다. 이후 판매 데이터가 다시 상품기획과 생산으로 돌아올 때 공급망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Chain에서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Loop로 바뀐다.
따라서 소싱 혁신의 시작은 좋은 공장을 더 많이 찾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의사결정과 데이터 흐름을 바꾸는 것이다.
# AI 도입보다 중요한 것은 ‘연결’…K패션에 필요한 것은 성장 Operating System
AI는 이 같은 변화를 더욱 빠르게 만들고 있다. 상품기획과 트렌드 분석, 디자인, 3D 샘플링, 수요예측, 생산관리, 콘텐츠와 마케팅까지 패션 밸류체인의 거의 모든 영역에 AI가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AI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AX 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가 제시한 M.AX(Manufacturing AI Transformation) 역시 개별 공장을 자동화하거나 특정 업무에 생성형 AI를 적용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기획과 디자인, 개발, 제조, 물류, 판매를 하나의 데이터 흐름으로 연결하고 판매 결과가 다시 상품기획과 생산 의사결정으로 돌아오는 AI Operating System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패션기업의 AX 성과는 ‘AI 솔루션을 몇 개 도입했는가’가 아니라 상품기획 시간이 얼마나 단축됐는지, 샘플과 개발 리드타임이 얼마나 줄었는지, 초도 물량의 정확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리오더 결정에서 실제 생산까지 얼마나 빨라졌는지, 악성재고가 얼마나 감소했는지로 측정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패션기업의 미래 경쟁력은 Brand, BM, Data, Supply Chain, AI를 각각 잘하는 데 있지 않다. 이들을 하나의 운영체제로 연결하는 능력에 있다.
K-패션 역시 이제 ‘해외에 나가는 것’과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해외 플랫폼 입점과 팝업스토어는 글로벌 진출의 시작일 뿐이다. 실제 Scale-Up은 수요가 발생했을 때 상품을 빠르게 다시 만들고, 시장별로 재고를 배분하며, 현지 소비자 데이터를 다음 상품에 반영하고, 이 과정을 반복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패션기업에게 소싱은 더 이상 원가를 줄이는 Back Office가 아니다. 브랜드의 성장 속도를 결정하는 전략 기능이다. 제조기업 역시 주문받은 상품을 생산하는 OEM을 넘어 소재와 디자인을 제안하고 적정 MOQ와 생산방식을 설계하며 판매 반응에 맞춰 리오더를 지원하는 ‘Sourcing Lab’으로 진화해야 한다.
# 브랜드는 디자인으로 시작하지만 SCALE-UP은 공급망에서 시작

서울대학교 패션산업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
정인기 DITO&DITTO 발행인이 이번 강연에서 제시한 Digital Sourcing Vision 2030은 이를 네 개의 단어로 압축한다.
SPEED × FLEXIBILITY × DATA × CONNECTION
디지털 생태계에서 K-패션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가’ 하나가 아니다. 좋은 상품을 만들고, 작게 검증하고, 소비자의 반응을 읽어 빠르게 다시 생산하며, 검증된 상품을 글로벌 시장으로 반복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K-패션의 다음 경쟁은 ‘히트 브랜드를 만드는 능력’에서 ‘히트 브랜드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출발점에는 이번 강연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 있다.
“브랜드는 디자인으로 시작하지만, SCALE-UP은 공급망이 움직이는 순간 시작된다.”
강인정 에디터 ditofashion@naver.com
K패션, ‘잘 파는 브랜드’ 넘어 ‘반복 성장하는 시스템’ 만들어라
정인기 디토앤디토 대표 강연 내용 중
K-패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마뗑킴, 마르디 메크르디,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를 비롯한 국내 브랜드들이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넘어 글로벌 소비자와 직접 만나기 시작했고, 무신사와 29CM 같은 패션 플랫폼 역시 국내 브랜드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브랜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K-패션의 지속적인 글로벌 성장을 낙관하기에는 시장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지금 패션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본질은 단순한 온라인 전환이 아니다. 시장과 채널의 경계가 사라지고 플랫폼과 브랜드, 유통과 제조, 콘텐츠와 커머스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경쟁의 단위 자체가 바뀌고 있다. 과거 브랜드가 같은 조닝의 브랜드와 경쟁했다면 이제는 플랫폼의 데이터와 물류, 콘텐츠와 공급망, 그리고 이를 하나의 비즈니스모델(BM)로 묶어낸 ‘생태계’와 경쟁해야 한다.
지난 9월 16일 서울대학교 패션산업 최고경영자과정(AFB)에서 정인기 DITO&DITTO 발행인이 진행한 「디지털 & 글로벌 이커머스 시대, K패션 스케일업을 위한 공급망 혁신」 특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AFB는 2002년 개설된 국내 최초의 패션·섬유산업 특화 최고경영자 교육과정으로, 2026년 제26기까지 약 1,200명의 산업계 경영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가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정 대표가 던진 질문은 ‘앞으로 어떤 브랜드가 뜰 것인가’가 아니었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우리 기업의 본질은 무엇이며, 브랜드의 성장 속도를 뒷받침할 운영체계는 준비돼 있는가”였다.
# 272조원 온라인시장…경쟁 단위가 ‘브랜드’에서 ‘생태계’로 바뀌었다
서울대학교 패션산업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
한국 소비시장은 이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단계에 들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국내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약 272조원 규모로 확대됐다. 온라인은 더 이상 오프라인을 보완하는 판매채널이 아니라 소비자가 상품을 발견하고 비교하고 구매하는 거대한 시장 인프라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장을 움직이는 권력의 변화다. 쿠팡은 2025년 Product Commerce 부문에서 295억 9,200만달러, 한화 약 41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4분기 Product Commerce Active Customer는 2,460만명으로 전년보다 8% 증가했다. 네이버의 2025년 커머스 부문 매출은 3조 6,884억원으로 26.2% 증가했으며 스마트스토어 연간 거래액도 10% 성장했다. 카카오의 2025년 커머스 통합 거래액 역시 10조 6,000억원으로 전년보다 6% 늘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을 단순히 ‘온라인 유통업체’로 묶으면 변화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쿠팡은 커머스와 물류, 멤버십을 결합하고 네이버는 검색과 콘텐츠, AI 추천, 커머스와 결제를 연결한다. 카카오는 메신저라는 소비자 접점에 선물하기와 커머스를 결합한다. 같은 상품을 판매하더라도 고객을 확보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수익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결국 디지털 생태계의 경쟁은 상품 대 상품을 넘어 BM 대 BM의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
패션시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빠르다. 29CM는 2025년 10월 연간 누적 거래액 1조원을 돌파했고, 무신사 인수 이후 거래액은 3배 이상 확대됐다. 무신사 글로벌 스토어 역시 같은 달 MAU 500만 명을 넘어섰고 거래액은 전년 동월보다 158% 증가했다.
패션 플랫폼은 이제 브랜드를 모아놓고 수수료를 받는 온라인 쇼핑몰을 넘어 소비자 데이터를 통해 브랜드를 발굴하고 콘텐츠로 노출하며, 오프라인과 글로벌 시장으로 성장을 확장하는 Brand Scale-Up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만큼 ‘어떤 생태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 것인가’가 중요해진 이유다.
# SHEIN이 바꾼 것은 ‘가격’이 아니라 패션을 만드는 방법이다
쉬인의 반응생산 시스템 [사진=쉬인 홈페이지]
디지털 생태계가 패션 비즈니스의 앞단을 바꿨다면 SHEIN은 그 변화를 제조와 공급망까지 확장했다. SHEIN을 단순히 ‘중국에서 싸게 만들어 세계에 파는 초저가 패션기업’으로 이해해서는 이 기업이 패션산업에 던진 핵심적인 질문을 놓치게 된다.
SHEIN의 혁신은 ‘패션의 소프트웨어화’에 있다. 전통적인 패션기업이 트렌드를 분석하고 판매량을 예측한 뒤 생산하는 Trend → Design → Forecast → Production → Sales 구조였다면, SHEIN은 초기 생산량을 SKU당 100~200개 수준으로 낮춰 시장 반응을 먼저 확인하고 판매가 검증된 상품을 빠르게 리오더하는 온디맨드 방식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K-패션이 주목해야 할 것은 SHEIN의 저가격이 아니라 얼마나 작게 시작하고, 얼마나 빨리 시장 반응을 읽으며, 판매가 확인된 상품을 얼마나 빨리 다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운영 방식이다. 결국 패션산업의 경쟁력이 정확한 Forecast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 Response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SHEIN이 던진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 브랜드가 커질수록 제조·소싱이 병목…‘공장 찾기’에서 Sourcing OS로
정인기 디토앤디토 대표 강연 내용 중
디지털 시대에도 브랜드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선택지가 무한대로 확대되고 검색과 SNS 알고리즘이 상품을 노출하는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단번에 기억할 수 있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시그니처 상품이 더욱 중요하다.
최근 K-패션의 성장도 이를 보여준다.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시그니처 상품, SNS를 통한 빠른 확산력을 갖춘 강소 브랜드들은 기존 대형 패션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시장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콘텐츠와 마케팅은 디지털을 통해 빠르게 확장될 수 있지만 생산 CAPA와 소재, 물류는 같은 속도로 늘어나지 않는다. 브랜드가 커질수록 품절과 과잉재고라는 상반된 문제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다.
정 대표가 대명화학의 브랜드 생태계를 BAMP 관점으로 해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BAMP는 Branding, Accelerate(SCM), Management(Commerce), Platform(BM·투자)을 연결해 브랜드의 반복적인 Scale-Up을 지원하는 성장 생태계를 의미한다. 브랜드 발굴과 마케팅에 그치지 않고 제조와 SCM, 커머스, 경영관리, 플랫폼과 투자까지 연결돼야 성장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패션기업이 거대한 생태계를 직접 구축할 필요는 없다. 현실적인 출발점은 Sourcing Portfolio다. 기존 글로벌 소싱의 질문이 ‘한국, 중국, 베트남 가운데 어디에서 더 싸게 만들 것인가’였다면 이제는 ‘어떤 상품을 어떤 공급망에 배치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한국은 샘플과 소량생산, DTP와 빠른 리오더를 활용한 Near-shoring과 Quick Response에 강점이 있다. 중국은 방대한 소재 생태계와 ODM 역량을 활용한 Development와 Flexible Scale, 베트남 등 동남아는 대량생산과 원가 경쟁력을 활용한 Scale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결국 글로벌 소싱은 ‘Cheapest Country’를 찾는 문제가 아니라 Portfolio Optimization의 문제다.
더 근본적인 혁신은 기업 내부의 데이터 흐름에서 시작된다. 고객의 검색과 판매, SNS 반응 데이터가 MD와 상품기획으로 연결되고, 수요 판단을 거쳐 Sourcing Control Tower에서 ODM·Quick Response·DTP 생산을 결정해야 한다. 이후 판매 데이터가 다시 상품기획과 생산으로 돌아올 때 공급망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Chain에서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Loop로 바뀐다.
따라서 소싱 혁신의 시작은 좋은 공장을 더 많이 찾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의사결정과 데이터 흐름을 바꾸는 것이다.
# AI 도입보다 중요한 것은 ‘연결’…K패션에 필요한 것은 성장 Operating System
AI는 이 같은 변화를 더욱 빠르게 만들고 있다. 상품기획과 트렌드 분석, 디자인, 3D 샘플링, 수요예측, 생산관리, 콘텐츠와 마케팅까지 패션 밸류체인의 거의 모든 영역에 AI가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AI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AX 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가 제시한 M.AX(Manufacturing AI Transformation) 역시 개별 공장을 자동화하거나 특정 업무에 생성형 AI를 적용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기획과 디자인, 개발, 제조, 물류, 판매를 하나의 데이터 흐름으로 연결하고 판매 결과가 다시 상품기획과 생산 의사결정으로 돌아오는 AI Operating System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패션기업의 AX 성과는 ‘AI 솔루션을 몇 개 도입했는가’가 아니라 상품기획 시간이 얼마나 단축됐는지, 샘플과 개발 리드타임이 얼마나 줄었는지, 초도 물량의 정확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리오더 결정에서 실제 생산까지 얼마나 빨라졌는지, 악성재고가 얼마나 감소했는지로 측정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패션기업의 미래 경쟁력은 Brand, BM, Data, Supply Chain, AI를 각각 잘하는 데 있지 않다. 이들을 하나의 운영체제로 연결하는 능력에 있다.
K-패션 역시 이제 ‘해외에 나가는 것’과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해외 플랫폼 입점과 팝업스토어는 글로벌 진출의 시작일 뿐이다. 실제 Scale-Up은 수요가 발생했을 때 상품을 빠르게 다시 만들고, 시장별로 재고를 배분하며, 현지 소비자 데이터를 다음 상품에 반영하고, 이 과정을 반복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패션기업에게 소싱은 더 이상 원가를 줄이는 Back Office가 아니다. 브랜드의 성장 속도를 결정하는 전략 기능이다. 제조기업 역시 주문받은 상품을 생산하는 OEM을 넘어 소재와 디자인을 제안하고 적정 MOQ와 생산방식을 설계하며 판매 반응에 맞춰 리오더를 지원하는 ‘Sourcing Lab’으로 진화해야 한다.
# 브랜드는 디자인으로 시작하지만 SCALE-UP은 공급망에서 시작
서울대학교 패션산업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
정인기 DITO&DITTO 발행인이 이번 강연에서 제시한 Digital Sourcing Vision 2030은 이를 네 개의 단어로 압축한다.
SPEED × FLEXIBILITY × DATA × CONNECTION
디지털 생태계에서 K-패션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가’ 하나가 아니다. 좋은 상품을 만들고, 작게 검증하고, 소비자의 반응을 읽어 빠르게 다시 생산하며, 검증된 상품을 글로벌 시장으로 반복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K-패션의 다음 경쟁은 ‘히트 브랜드를 만드는 능력’에서 ‘히트 브랜드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출발점에는 이번 강연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 있다.
“브랜드는 디자인으로 시작하지만, SCALE-UP은 공급망이 움직이는 순간 시작된다.”
강인정 에디터 ditofashion@naver.com